
BUSAN
부산
移建記 우리는 그날의 高貴한 얼과 正統的 脈을 이어받고자,
釜山直轄市 文化財委員會의 議決을 거쳐
前 釜山鎭日新女學校 所在地 東區 佐川洞 七六八番地로부터
이곳에 옮겨 세우다 一九九二年 五月 十四日
(이건기 우리는 그날의 고귀한 얼과 정통적 맥을 이어받고자 부산직할시 문화재위원회의 의결을 거쳐 전 부산진일신여학교 소재지 동구 좌천동 768번지로부터 이곳에 옮겨 세우다 1992년 5월 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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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진일신여학교는 부산 최초의 여성 교육기관이면서 바로 부산에서 최초로 3.1만세운동이 시작된 곳이다.
부산에서는 부산진일신여학교의 교사와 학생들의 주도로 본격적인 만세운동이 시작되었다. 서울과 평양 등지에서 일어난 3.1운동에 이어 부산에서는 1919년 3월 3일경부터 시위 조짐이 일어났다. 하지만 이날 기독교 신자들이 독립선언서를 배포하는 모습을 본 경찰이 그들을 모두 체포하면서 무산되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 3월 10일 아침, 영주동, 초량, 부산진 등에서 간밤에 붙인 듯한 태극기와 독립선언서 격문이 발견되었다. 이로 인해 일본 경찰들은 더욱 엄중한 경계에 들어갔다.

일본 경찰은 부산상업학교, 동래고등보통학교, 일신여학교 등을 중심으로 시위를 준비하고 있다는 첩보를 입수하였다. 3월 11일 일제 경찰은 시위 발생을 원천 차단하기 위해 휴교를 단행하고 학생들을 강제 귀가시켰다.
그러나 이날 아침, 일신여학교에서는 4학년 학생 김응수가 교정에서 전단을 발견하고 교사 주경애에게 전하였다. 그리고 그날 밤 9시, 교사 주경애와 박시연을 주축으로 일신여학교 학생 9명의 만세시위가 시작되었다.
그들이 부산지역에서 3.1만세운동의 신호탄을 쏘아 올린 것이다.
1919년 3월 11일 만세운동으로 옥고를 치른 뒤 부산진일신여학교 교사와 학생들이 기념촬영한 사진. 부산진교회 제공
대한민국 독립운동사의 큰 발자취
시위 이후 주경애・박시연과 함께 일신여학교 학생 9명과 일반인 2명이 경찰에 체포되어 보안법 위반으로 기소되었다. 주경애와 박시연은 징역 1년 6개월, 김응수를 비롯한 학생 9명에게는 징역 5개월의 실형이 선고되었다.
체포된 교사와 친구들의 치욕적인 수감생활 소식을 전해 들은 일신여학교 학생들은 분노하여 4월 8일 2차 만세 시위를 벌여 일제의 만행에 단호하게 대응하였다.
일신여학교의 3.1운동은 일본 경찰의 엄중한 감시와 통제로 인해 부산상업학교와 동래고등보통학교에서 계획되었던 시위가 무산된 시점에서 과감하게 전개된 부산 여성들의 항일구국운동이었다.
또한 일신여학교의 만세시위는 이후 부산지역을 비롯해 경남지역 3.1운동의 효시가 됨으로써 대한민국 독립운동사에 큰 발자취를 남겼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