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코필드(Frank William Schofield, 石虎弼, 1889~1970)는 1919년 3월 1일 우리민족이 일제의 식민지배에 항거하여 독립을 선언하고 만세운동을 일으켰을 때, 3.1운동에 대해 통보받고 협력을 요청받았던 유일한 외국인이었다.

스코필드 박사의 항일운동
3.1운동
1919년 4월 15일
1919년 4월 18일
3·1운동이 일어나자 독립운동 현장을 직접 카메라에 담고 독립운동의 실장을 체험하여 기록하였다. 그 리고 피해를 당하는 학생들을 캐나다인 신분을 이용하여 구출하고, 일본 경무국장과의 친분관계를 도용하여 구출하기도 했다.
음력 3월 1일이 되자 제2의 3·1운동이 지방에서 일어났다. 지방에서 독립운동을 했다는 이유로 일본군 책임자가 수원군 향남면 제암리 마을 주민들에게 알릴 사항이 있다고 거짓말을 하여 제암리 교회에 모이도록 하였다. 마을 사람들이 작은 교회에 들어오자 문을 잠그고 총을 난사하고 불을 질러 26명의 양민을 학살하였다.
이 사건이 알려지자 스코필드는 삼엄한 경비를 서는 일본 경찰을 따돌리고 수원에서 자전거로(스코필드는 소아마비 증세로 왼쪽 팔과 오른쪽 다리가 마비되어 한쪽 다리로 자전거를 배워 탔다.) 제암리까지 잠입하였다. 거기서 또 일본 경찰을 만났으나 몰래 제암리의 총 살·방화 현장을 촬영하는데 성공하였다.


제암리 만행 사건 보도기사
스코필드는 3·1운동을 체험하고 사진으로 담은 산증인임과 동시에 한국인을 여러모로 보살피고, 언론활동으로 일본의 만행을 해외와 국내에 고발하는 활동을 하였다.
수촌리에서 일본 경찰에 구타당하여 몸을 심하게 상한 사람을 다음날(4. 19) 다시 내려가 수원 관비병원에 입원시키는 의리를 지켰다.
일본의 제암리 만행과 한국인의 독립운동을 해외에 알리기 위해 캐나다나 미국으로 나가는 친구들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해외에 보도토록 하였다. 일본 제국주의의 잔혹상이 폭로되었고, 일본의 언론에서도 제암리 학살 사건에 대한 질타의 기사가 나왔다.

스코필드가 한국인을 돕는 것이 알려지자 조선총독부 당국에 의해 강제 출국을 당하게 되었다. 그는 이때에도 총독에게 탄원하여 감옥에 갇혀있던 독립운동가인 이상재, 이갑성, 오세창 등을 면회하고 격려하였다.
스코필드는 캐나다로 건너가 대학교수로 활동하다가 한국을 수차례 방문하며 한국을 잊지 못했다. 스코필드의 3·1운동 역사 기록과 사진을 한국에 기증하여 보도되었다.
1958년 대한민국 건국 10주년 기념식에 초빙되어 내한하였고, 1960년 ‘대한민국 문화훈장’을 받았고, 1968년에는 ‘건국공로훈장’을 받았다.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에서 강의하였고, 1969년부터 한국에 영구 정착하여 여생을 한국에서 마쳤다. 외국인 최초로 한국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